Okay then YOU do it! > 그럼 당신이 해 봐!

아래는 나의 손위 처남이 오래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

“생명의 숭고함과 소멸의 아름다움 보여주신 내 어머니.”

어머니!

당신이 이민가신 후 저는 매년 읍민회와 망향제 그리고 군민회까지도 빠짐없이 나가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고향어른들 틈에서 사진으로만 뵌 내 아버지와 멀리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어 왔습니다. 이제 당신의 유골을 향원(묘지)에 안장했으니 명절날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에 가서 서성거리진 않겠습니다. 이남에서 나를 키워주신 아버님 곁에 모시지 않은 것은 용서하실 줄 믿겠습니다. 동생들도 이해합니다. 그 분은 북청향원, 당신은 신포향원 다 같은 우리 경기도 땅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는 날 두 분 다 고향으로 반드시 모시고 갈게요.

LA 한국장의사에서 입관예배 드릴 때 당신의 딸이 추도한 어머니에 대한 추억 생각나세요? 수술 후를 걱정하며 붙잡고 울던 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오히려 위로해 주셨다는 멋쟁이엄마를 회고하는 그 애절한 사연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였지만 당신의 누워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곱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고통이 희망이셨던 당신 생명력의 숭고함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유족대표로서 제가 올린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자식들의 다짐이기도 하지요. “북청물장수의 후예로서, 자랑스런 신포인의 긍지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에 나뉘어 살고 있는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가 주신 목숨을 감사하며 죽는 날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엄마!

헤어짐과 그리움의 아픔은 어찌 그리 영롱한지요?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당신의 열정어린 삶을 헤아리면서 한오백년은 못 살아도 이제 겨우 칠십초반에 우리와 영원히 헤어진 당신의 흔적을 아쉬워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돌아오는 한식날에는 패끼넣은 밥(팥밥)과 명태식해를 차려드릴테니 이 아들과 함께 냉수에 훌훌 말아서 한술 뜨실 수 있겠지요?

어마이!

오늘밤도 이 아들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잠드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흐려지는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펴겠습니다. 실수하며 더듬거리고 사는 자식들 걱정마시고 당신이 계신 그곳 삶과 죽음의 구별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부디 영생을 누리소서. 

아들 일모

▲ 종이신문보기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1&M=02&D=12&ID=0102124202

기록인/ 강일모(강일모·54·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고향/ 함남 북청군 신포면 문암리

실향기록관’은 실향민과 후손들의 사연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 분량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문의: 조선일보사 통한문제연구소 (02)724-6521~6524.
이메일: nkreport@chosun.com


윗글에서… <사진으로만 뵌 내 아버지>의 사연은 아래와 같다.

(사실 나도 이 기막힌 사연을 내가 처남 커플을 미국 우리 집으로 초대했던 2000년 가을에 처음 들었다.)

우리 처남은 내 처와 열살 차이로 아버지가 다르다.

영화 국제시장의 오달수 처럼 1.4 후퇴때 장모님 등에 업혀 미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네살 때인가?… 그후 우리 장모님은 국제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시며 돈을 벌었고 한참 후 재혼을 하셨는데 두분 사이의 첫째 딸이 지금의 우리 마눌님 이시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처남은 한양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어느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중동으로… 수년간 열사의 사막에서 고생한 후 서울 본사로 와보니 원래 자기가 앉아야할 책상과 의자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소위 국내파와 해외파의 대립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곳 저곳 직장을 전전하다 어느 날 사오정이 되어 백수신세… 해서 내가 미국으로 초청한 것이다.

한달간 이곳에 체류하며 여러곳을 여행 다녔다. 처남 부부가 함께.

어느날 저녁 우리 처남이 제일 좋아하는 Jack Daniel’s를 함께 마시다 조용히 꺼내는 얘기…

Jay… 사실은 윤정이 엄마 (My Wife)하고 나 하고는 아버지가 달라… (나는 많이 놀랬다)

요약하면…

처남의 부친은 1.4 후퇴 당시 25세의 젊고 잘생긴 인민군 정훈장교 였는데… 전쟁터에 나간후로 연락이 끊어졌다. 아수라 상황에 어쩔수 없어서 피난선을 타고 내려왔는데, 10년 가까이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 해서… 어머니는 그후 같은 동향분을 만나게되어 재혼 하신 후 서울로 이사.

DJ 정권이 들어서자 남북화해 분위기… 바로 중국을 거쳐 입북해서 고향 마을을 찾아 친척분들께 부탁해서 아버지 묘소를 찾아 분향하려 했으나… 실패. Why?… 아버지 묘소가 있을 것으로 알았던 지역 전체가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통째로 사라져버리고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 오셨단다.

우리 장모님은 미국에 오셔서 우리 아들과 딸래미를 돌보아 주시며 함께 7년 정도 지내시다 1998년 1월에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장례식을 치뤘는데 그때 참석했던 처남이 화장후 어머니의 유골을 담은 조그만 박스를 들고 한국에 가서 다시 입관 장례를 고향분들과 함께 치른후 경기도 신포향원에 묻혀 드렸다.

그 직후 미국에서 치른 어머니 장례식의 소회를 조선일보에 보내 신문지에 프린트 되었던 기사가 17년이 지난 지금도 온라인으로 조회가 가능하다. 내가 왜 이런 낡은 신문기사와 사연을 이 싯점에 올리는지 생각해 보시라.

틈나는 대로 우리 장모님이 즐겨 부르시던 ‘솔베이지 송’과 사진 몇장을 찾아 첨부하려한다.

아들넘 태어난 해 여름 그랜드캐년 랏지에서, Summer 1985

저때는 애써 찾으려해도 ‘싸울 꺼리’가 없었다. 적어도…15년 후 까지는.

정말이지 단 한번도 내가 고함을 지른 적이 없었으니까.

딸래미는 외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목사님 딸래미 결혼식 플라워 걸 차림으로 집 앞에서, Spring 1997
아마도 우리 모두가 가장 행복해 했었던 시절… just like happy clams in the sea.

솔베이지 송을 부르며…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었으면. 목련꽃 그늘 아래서…

 

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에서… Riverside, CA
Summer 2000
바로 이런 어른 다운 어른이 필요한 싯점이다. 남북한이나 이곳 미국에서나.

누가 과연 이분을 대신할 것인가… 바로 당신이?

아니면… 조용히 침묵을 지키시고.

함께 찾아보자.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이제 그만 싸우고 —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고?… 과연 그럴까?

7천만 한국인 중에 단 한명도?

그렇담… 외국에서 수입하자. 스포츠 선수 처럼.

이박이 찾아낸 이런 대통은 어떨까? > http://blog.koreadaily.com/chirodr/857829

이 양반도 안된다고?… 친일파 후손들 다 잡아 죽인다고?

오… 그려?

그럼 당신이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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